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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의 아픔 서린 DMZ서 평화를 연주하다

제작 조선일보

우크라이나의 ‘키이우 비르투오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입국하자마자 지난 25일 강원도 고성의 DMZ 박물관부터 찾아갔다. 올해 20회를 맞은 평창대관령음악제에 초청받은 이들은 이 박물관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현대음악과 우크라이나 민요 등을 연주했다. 이 악단 예술감독인 첼리스트이자 지휘자 드미트리 야블론스키(61)는 “지금은 아름답고 깨끗하고 조용한 비무장지대가 70여 년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렸던 전쟁터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전쟁의 비극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또 다른 비극의 현장에 오니 감정이 남달랐다”고 말했다.

이 악단은 지난 2016년 창단 이후 7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세계 음악계의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들의 운명도 송두리째 흔들렸다. 단원과 가족들은 고국을 떠나 현재 이탈리아 로마 근교 도시인 키에티에 체류하고 있다. 야블론스키 감독은 “우리 단원들의 부모 형제 중에는 우크라이나 군인으로 참전하신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냉전 시절 소련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야블론스키는 아홉 살에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으로 데뷔한 ‘첼로 신동’ 출신이다. 명피아니스트인 옥사나 야블론스카야의 아들로도 유명하다. 이들 모자(母子)는 1970년대 소련을 떠나기 위해 이민 신청을 용기 있게 했다가 3년 가까이 ‘가택 연금’을 당했다. 그는 “어머니는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연주가 취소됐으며, 나 역시 학교에도 가지 못한 채 감옥처럼 집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다. 북한 같은 독재 체제의 현실을 겪어보았기에 너무나 잘 안다”고 했다. 하지만 배우 캐서린 헵번과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같은 저명 인사들이 이들 모자의 구명(救命) 운동에 앞장선 덕분에 결국 비자 발급을 받았다. 야블론스키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거쳐서 미국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들고 있던 건 옷 가방 하나와 10달러뿐이었다. 물론 나는 영어는 한마디도 못했고…”라며 웃었다.

그는 굳이 분류하면 러시아계 유대인이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도 단원들과 함께 꾸준하게 연주 활동과 음반 녹음을 하고 있다. 지금은 미국·스페인·이스라엘의 여권 3개를 들고 다닌다. 그는 “우리가 문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우리를 싸우게 하는 것”이라며 “단원들과 세계 음악계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 역할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했다. 내년에는 미국 순회 연주도 앞두고 있지만, 그는 “내일 당장이라도 전쟁이 끝나서 단원과 가족들이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키이우 비르투오지 연주회는 28일 춘천, 29일 평창, 30일 동해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