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첫날부터 전석 매진… 관객을 압도하는 노장의 에너지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공연한 뒤 70년.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해석으로 수많은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렸다. 국내에서도 극단 산울림의 공연만 1500여 회, 22만 관객이 이 기다림을 지켜봤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를 향해 누군가는 ‘뭐 새로운 게 있겠느냐’ 냉소할지도 모를 일. 하지만 19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한 새로운 ‘고도’를 첫날부터 전석 매진시킨 관객들의 기립 박수는 이런 냉소를 향한 반박 같았다. 이날 관객들은 오래 기억될 또 다른 ‘고도’의 탄생을 지켜본 증인이 되었다.
한국 연극을 대표하는 대배우들이 함께 오르는 것만으로 이 무대는 장관이다.
‘고고’ 신구(87)와 ‘디디’ 박근형(83)은 나이가 무색한 에너지로 150분 공연 내내 무대에서 걷고 구르고 뛰어다녔다. 만담 듀엣처럼 속사포 같은 대사를 주고받는데, 특히 2막의 속도감이 아찔하다. 배우 신구의 가슴 속 심장 박동기가 그려내는 심전도 그래프에 매달린 듯, 관객의 마음 상태는 극이 이끄는 대로 웃음과 눈물, 기쁨과 슬픔 사이를 숨 가쁘게 오르내린다. 고고와 디디가 아파할 때, 아무 일 아닌 듯 “뭘 뉘우쳐? 우리가 태어난 거?” “난 불행해!” 같은 대사를 툭툭 뱉어낼 때,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경험은 놀랍다.
2막 중반 두 사람이 객석을 가리키며 “저거 봐, 저 시체들 좀 봐”(디디) “저 해골들 말이지?”(고고) 하고 말할 때, 극장은 폭소의 도가니. 무대 위에 펼쳐진 것은 생과 사, 집착과 허무, 생의 기쁨과 슬픔이 모두 경계를 넘어 스며들고 교직되는 아이러니와 부조리의 세계다.
지식과 인습의 감옥에 갇혀 노예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짐꾼 ‘럭키’ 박정자(81)와 럭키를 노예처럼 부리는 지주 ‘포조’ 김학철(64)은 이 연극이 성찰하는 부조리함의 한 측면을 드러내는 상징과 같은 캐릭터. “생각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쉼표도 없이 8분여 내달리는 박정자의 독백 장광설은 연습실에서보다 무대 위에서 더욱 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연극이 뿜어내는 매력의 중심에는 ‘고고’와 ‘디디’ 자체가 된 배우 신구와 박근형이 있다. 이날 공연을 본 중견 연출가 박정희는 “배우들이 캐릭터 그대로다. 참 좋은 극”이라고 했다.
공연 뒤 분장실에서 만난 배우 신구는 공연의 여운에서 빠져나오려는 듯 차분하고 조용했다. 무대 위에서 가장 바삐 움직였던 배우 박근형은 냉수마찰 하듯 타월로 땀에 젖은 몸을 닦았다.
제작사 파크컴퍼니 박정미 대표는 “신구 선생님은 두 달여 고된 연습 기간에 오히려 몸무게가 3㎏ 불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고고’, 선생님의 ‘인생 캐릭터’가 될 것 같다”며 웃었다. 공연은 내년 2월 18일까지.